g:colon book2014.06.24 12:02

베를린 디자인 소셜 클럽

: 베를린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기

 

베를린과 이웃하기

_용세라


 

Berlin Map


한 달 반 가량을 지내던 베를린의 미테 지역은 서울로 치면 강남쯤 되는 중심가로 집값이 비싸고 교통편이 좋다. 출근 전과 퇴근 후를 이용해서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홀로 독립하려니 미테 지역에서 또 다른 집을 찾기는 다소 어려웠다. 하루에 기본 서너 군데 이상을 인터뷰하러 다녔는데, 이 인터뷰라 함은 함께 집을 사용하게 될 룸메이트들이 그들과 함께 살만한 괜찮은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캐주얼한 분위기보다는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인터뷰 볼 사람을 불러 굉장히 사무적이면서, 피 튀기는 경쟁으로 어색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있으려니 얼굴에 경련이 나기도 했다. 어떠한 곳에 가면 전 시간에 인터뷰 온 사람과 마주치기도 하고, 인터뷰 중간에 내 다음 차례의 사람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이렇게 베를린에서는 주거 방식 중 하나로 셰어하우스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지나치며 인터뷰 때 만났던 경쟁 상대였던 사람들 중 두 명을 우연히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만난 것이다. 그중 한 명은 베니인데, 오래전에 HORT에서 인턴을 했던 친구로 스튜디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주 보게 되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또 한 명은 포르투갈에서 온 브루노이다. 몇 달 후에 직장인반 독일어 클래스에서 브루노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역시 베를린에 정착한 디자이너였으며, 알고 보니 나와 함께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했던 포르투갈에서 온 친구의 친구였다.

내가 집을 구하던 4월은 입학 시즌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집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어려우면 얼마나 어렵겠어라며 콧방귀를 뀌었던 나 자신에게 도로 콧방귀를 뀔 정도였다. 인터넷에 나오는 매물들에 하루에 열 개씩 이메일을 보내면 그래도 운 좋게도 절반 정도는 답장이 오곤 했다. 그렇게 출근 전에 한두 군데의 인터뷰를 하고, 또 퇴근 후에 한두 군데를 더 돌아보면 집에 오자마자 녹초가 되었다. 그러던 중 4월에는 꼭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기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최대한 빨리 들어갈 수 있었던 노이쾰른을 임시 거처로 삼게 되었다.

노이쾰른은 베를린의 동남쪽 지역으로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몇 년 전만하더라도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잘 가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그 일대에 많은 바와 클럽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소위 말해 뜨는 지역이 되어 많은 젊은이들이 옮겨갔다.

내가 지내게 될 곳은 새로 지어진 건물이어서 깔끔하고 좋았지만 접근성이 나쁘다는 가장 큰 단점을 갖고 있었다. 서울이었다면 혼자 어두운 길을 걸을 때 엄마나 친구와 통화를 하며 거닐었겠지만, 당시에는 통화 1분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지는 프리패이드용 전화를 쓰고 있던 터라 무서움을 홀로 달래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쨌든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고 느꼈는데 출근길에 늘 길게 느껴지는 길이 밤에는 나도 모르게 경보를 하게 되서 항상 생각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코리안 디너, 노이쾰른에 살던 때의 집이다.

 

잠시 머물렀던 공간은 2인 아파트로 함께 지내는 친구가 보통은 베를린에 있지 않았던 탓에 혼자 그 공간들을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이 HORT 식구들과 친목 도모를 위한 코리안 디너였다. 평소 요리와는 담을 쌓고 살던 터라 만들어 본 한국요리라고는 없었지만, 컴퓨터만 켜면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이니 우선 단체 메일을 통해 스튜디오 사람들을 모두 초대했다. 미국과 핀란드에 잠시 휴가를 떠난 네이슨과 안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오기로 했다. 목요일이었으나 공휴일이었던 관계로 애들리와 파블라가 다섯 시쯤 도와주러 오기로 했다. 그 전날 재워둔 불고기와 한인마트에서 산 만두, 잡채와 두부 샐러드, 김치달걀말이를 만들었으나, (게다가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맛도 그다지 별로였으나) 분위기만큼은 대성공이었다. 불고기는 스튜 정도의 느낌이었고 만두는 차갑게 식었으며, 잡채는 불어있고 두부에서는 쉰 맛이, 김치달걀말이는 그냥 김치와 달걀이었다. 그래도 그 후에 아이케가 그의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나의 코리안 디너에 대해 자랑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는 성공했나 보다. 그때 참석하지 못했던 네이슨은 2회 코리안 디너는 언제 하느냐고 아직도 묻곤 한다.

내가 더는 이사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 집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파블라는 자신이 사는 건물에 원룸 아파트 하나가 곧 비게 될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나는 집의 상태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 원룸이 그만한 가격이면 좋은 조건이라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집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그 집은 파블라와 네덜란드에서 함께 공부했던 헬싱키 출신의 라우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같은 건물의 집이지만 그 원룸보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니 어쨌든 우리 셋은 모두 이웃이 되었다. 그렇게 옮긴 그 집이 지금 내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다. 작긴 작지만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곳이 이 도시에 있다는 게 절로 마음의 위안을 준다. 그리고 하나둘 잡동사니들도 늘어 이제는 조금 더 큰 곳으로 이사하고 싶어도 예전처럼 큰 캐리어 가방 두 개로는 턱도 없어 이사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두었다.

우리 건물의 집주인인 안드레아스는 그 빌딩 1층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고, 그 서점에는 공간의 거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 음악과 책을 사랑하는 낭만파인 그는 수시로 피아노의 밤을 열었고, 그가 아는 피아니스트를 초대해 연주를 요청하거나 파블라가 연주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시끌벅적한 이벤트는 아니었지만, 이웃 간의 친목을 위해 이사한 초창기에는 늘 참석하곤 했다. 그렇게 이 집으로 이사 온 뒤로는 베를린에 정착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사할 걱정 없이 필요한 가구들을 살 수 있었으며 우체통과 초인종에도 내 이름을 붙여 두었다.


새로 이사한 프리드리히샤인 지역


이 동네는 동베를린이었던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으로 바로 앞에 지하철과 트램 역이 있어 접근성이 늘 만족스러웠다. 프리드리히샤인은 참 재미있는 동네다. 조용하고 안전하며 일요일마다 제법 큰 박스하게너 플라츠 벼룩시장이 열려 편안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꽤 유명한 공원인 폭스파크에는 비치발리볼을 하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동역을 중심으로는 한번 들어가면 이틀 후에나 나오게 된다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인 베르그하인이 있고 그 주변으로도 여러 유명한 클럽들과 바가 모여 있다.

낮에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가 손을 잡은 가족 단위의 이웃들이 많은가 하면,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바들이 문을 열고 자정이 넘어가면 클럽에 가려는 젊은 친구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리고 동이 터오는 새벽이 되면 케밥집과 피자가게 앞이 북적인다. 베를린에서는 케밥과 피자가 우리나라의 해장국이나 감자탕 정도 되는 셈이다. 올 초에는 조금 더 큰 집에서 살고 싶은 욕심에 이사를 가볼까 생각하다가도 이 동네를 떠나기는 싫어 마음을 다잡았다.


프랑크프루터 토어(Frankfurter Tor)는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의 명물 중 하나이다.


현재는 프리드리히샤인과 크로이츠베르크의 통합 명칭인 프리드리히샤인-크로이츠베르크를 사용하고 있지만, 1961년에는 그 사이를 기점으로 동과 서를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있었다. 그 경계가 되었던 슈프리강을 매일 스튜디오를 가는 길에 M10 트램을 타고 건너는 것은 무언지 모를 오묘한 기분이 들며 그 매력을 더한다.

베를린에 온 첫해에 누노와 함께 터키쉬 플리마켓에서 35유로를 주고 산 작은 중고 자전거를 도둑맞은 후(그 후로도 한 차례 더 도둑맞았다), 출퇴근 시에는 매일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베를린의 지하철과는 얽힌 이야기가 참 많은데, 그 이야기들이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나는 여전히 베를린의 지하철을 사랑한다. 독일의 지하철 안은 독일인들의 맥주 사랑을 보여주듯 평일에도 여섯 시가 넘어가면 맥주병이 들려있지 않은 손을 찾기 힘들다.


베를린의 지하철은 U반과 S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U반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지하철이고, S반은 링반으로 불리기도 하는 순환선으로 서울의 국철과 비슷한 느낌이면서 지하철 2호선과 같은 모양이다. S반은 U반보다 자주 이용하지 않지만, S반을 타면 베를린 근처의 작은 도시까지 갈 수 있어 가끔 타게 되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베를린은 크게 A, B, C존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보통 베를린의 중요 지역들은 A존 안에 밀집되어 있지만, 집값 때문에 B존이나 멀리는 C존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나 가족들도 많이 있다. 티켓은 그 존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나는 보통 한 달 정기권을 매달 끊어 이용하는데 사실 인턴십 기간에는 월급이 늦게 입금되거나 하면 돈이 빠듯해 표를 사지 않고 무임승차를 하곤 했다. (법을 어긴 사실을 더 고백하자면, 아티스트 레지던시 시절에는 4개월 동안 무임승차를 했으나 한 차례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걸리지 않을까 하는 속앓이로 인해 속병을 얻었고, 심지어 무임승차 1개월이 되던 때에 모든 사복 경찰의 얼굴을 외우기도 했다)

베를린의 지하철에는 따로 개찰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맡겨 표를 사고 이용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사복차림의 검표원들이 수시로 검사를 하기 때문에 사실 그리 양심에 맞기는 시스템이라 할 수는 없다. 내 몸집에 두세 배는 거뜬히 되는 검표원들에게 걸렸을 때 이러저러한 변명들로 수차례 위기를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는 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차례 40유로의 벌금을 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글의 전문은 베를린 디자인 소셜 클럽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저자소개

용세라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디자인과를 졸업할 무렵, ‘사랑과 평화시장디자인 스튜디오를 시작했고, 2010년 서울에 스튜디오와 같은 이름의 갤러리를 동시에 운영했다. 2007년에 파리에서 지냈던 좋은 기억들로 인해 유럽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살던 중, 2011년 베를린에 건너가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베를린의 디자인 스튜디오 HORT에서 일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세계 각지의 클라이언트들과 프리랜서 일도 병행하고 있다.




Posted by 지콜론북 G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