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olon book2015.07.28 17:04

맥주 맛도 모르면서

 

상황 별 맥주 선택법

: 지금 이 순간, 맥주 한 모금

 

 

_안호균, 그림_밥장,  정리_김소영

 

 

 

 

결정 장애라는 말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따끈따끈한 신조어입니다. 선택의 순간, 이런저런 고민 탓에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괴로워하거나, 고민이 심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지요. 비록 장애라는 표현이 들어가긴 하지만 심각한 문제라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보기가 주어지는 객관식 문제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야하는 주관식 문제보단 한결 마음이 편합니다. 운이 좋으면 찍어서맞힐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식이 아닌 상식과 직관이 더 큰 역할을 하는 일상생활 속 선택의 순간에는 무엇을 고르든 그 나름의 의미와 장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애초에 결정이 어려운 것은 각각의 선택지마다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부분이 한두 가지 씩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맥주를 마시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 이른바 맥주 선택 결정 장애역시 최근에 등장한 반가운 현상입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맥주를 마시느냐, 소주를 마시느냐는 우리 모두를 햄릿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어떤 맥주를 선택하느냐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만큼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양한 맥주를 상황과 기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있는 사람에 맞춰 고르는 일은 사뭇 까다로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헌데 그 선택의 까다로움이 이제는 우리의 개성과 취향을 멋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어쩌면 달콤 쌉싸름한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긴장감이 감도는 근사한 사람과의 데이트엔 어떤 맥주가 어울릴까요? 맥주를 좋아하는 이들 사이의 만남이라면 어떤 것을 고르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로맨틱한 만남엔 역시 와인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신중하게 선택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야 이미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는 몸이라 딱히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만 아주 예전의,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의 희미한 기억을 굳이, 애써, 필사적으로 끄집어내 보겠습니다. 이 모든 게 사랑이 (그리고 맥주가) 넘치는 세상을 위한 일이니까요.

 

제 경험상 로맨틱한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맥주는 역시 에딩거Erdinger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적인 맥주와는 달리 보리와 더불어 밀을 사용해 빚은 맥주이다보니, 에딩거에서는 밀이 자아내는 특유의 달콤함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진지한 듯 기품 있는 그 풍미는 단박에 와인에 대한 미련을 잊게 합니다. 더불어 그 색을 유심히 살펴보면, 맑고 청명한 황금빛 라거Lager보다는 뿌옇고 탁한 느낌이, 진한 호박색이나 적갈색의 에일Ale보다는 밝고 가벼운 기운이 서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일단 이런 특징만으로도 5분 정도는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는 서로 눈빛만을 바라보며 황홀함에 몸서리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되지만, 저 같은 보통사람은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람과 나누는 기쁨과 슬픔의 수다가 그 무엇보다 큰 기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딩거는 매우 훌륭한 대화 유발자입니다.

 

 

무더운 한여름만큼 맥주가 잘 어울리는 계절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고 해서 맥주를 마셔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을쏘냐마는 역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야말로 맥주가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갈급할 때 과연 어떤 맥주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요? 사실 어떤 맥주든 상관없습니다. 이럴 때는 탄산이 다 빠지고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맥주마저 고마울 지경인데, 냉장고에서 갓 꺼낸 얼음같이 찬 맥주라면 웃돈을 주고라도 손에 넣고 싶어집니다. 아니 입 안에 넣고 싶어진다고 해야겠지요. 그래도 굳이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삿뽀로Sapporo를 선택하겠습니다. 시원한 청량감이 그리운 순간, 풍미가 진하거나, 깊이감 있는 맥주는 제 역할을 하기 어렵지요. 그렇다고 보리가 한 번 목을 타고 지나간 듯한 밍밍한 맥주 역시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삿뽀로는 라거 본연의 신선함과 적당한 무게감이 절묘한 균형을 이뤄 여름의 동반자로 손색없는 맥주입니다.

 

혼자 소파에 기대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을 때, 오랜 벗들과 모여 왁자지껄 회포를 풀 때 혹은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샤워를 막 끝냈을 때 우리는 모두 한 모금의 맥주를 간절히 떠올립니다. 이 정도 비용과 노력으로 이 정도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나만의 순간에 어울리는 나만의 맥주를 두어 가지쯤 가진 것도 썩 근사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만이 간직한 비밀 아닌 비밀인 셈이지요. , 이제 본격적으로 맥주에 관한 제 비밀을 풀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비밀은 무엇인가요?

 

 

 

*위 내용은 책 맥주 맛도 모르면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작가 소개

 

안호균 ()

번역가이자, 작가인 안호균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영어로 번역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였다. 아직까지는 메밀국수를 즐겨 먹는 평범한 번역가이자 영어강사이지만, 학생 시절 품었던 희망은 지금도 잃어버리지 않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 경제, 경영, 건축, 조경 등 다양한 분야의 논문 및 학술서 등을 번역했으며, 앞으로 맥주와 관련된 책을 쓸 예정이다.

 

 

밥장 (그림)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밥장은 지은 책으로 떠나는 이유, 밤의 인문학,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내가 즐거우면 세상도 즐겁다등이 있다. 평범한 회사원을 때려치우고 그림 그리며 먹고 산 지도 어언 십 여년이 흘렀다. 올해부터는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걸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지만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기막힌 그림으로 끝장을 보자는 생각은 깨끗이 지웠다. 대신 그림을 통해 할 수 있는 재미나고 가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있다. 30년 동안 살아온 은평구 구산동에 <믿는구석>이라는 작업실(을 빙자한 놀이공간)을 차려 밤마다 미러볼 아래서 친구들과 맥주를 홀짝거린다.

 

 

 

Posted by 지콜론북 G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