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디자인2011.07.29 11:18
g: Design Essay
 

도시 정보 디자인에 대한

디자인 비평




창의적 보행과 공감각적

도시 정보 읽기


김상규 서울과학기술대 공업디자인학과 교수






디자인미술관에서 전시 기획자로 한창 일할 때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도판으로만 보던 작품을 직접 본다는 기대감에다 관계자와 협의해야 하는 부담이 겹쳐 늘 긴장되었고 일정도

빠듯해서 처음에는 지구 반대편의 낯선 거리를 걷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트렁크를 끌고 호텔을 나오는데 바퀴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낡은 싸구려 트렁크라 으레 그러려니 하다가도 조용한 거리에서 울리는 독특한 리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다른 도시에 도착하고 다시 트렁크를 끌면서 왜 그것이 독특하게 들렸는지 알아차렸다. 트렁크 바퀴는 고스란히 그 도시의 길을 읽어내고 전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의 보도블록이 밀라노, 암스테르담, 베를린, 도쿄, 런던의 그것들과 패턴이 다르고 같은 블록이라도 단위의 크기가 달라서 덜컹거리는 간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높고 낮은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같은 도시라도 거리마다 달랐고 내 발바닥보다도 바퀴가 바닥패턴의 변화에 훨씬 더 민감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캠코더를 트렁크에 달아 바닥 촬영을 시도할 만큼 낯선 거리를 걷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너무 덜컹거려서 실제 촬영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 경험은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원제: The Condition of Post Modernity, 구동회, 박영민 옮김, 한울(1994)) 가운데 ‘사회생활에서의 개인적 공간과 시간’이라는 글을 떠올리게 했다. 하비는 시간지리학이 다루는 일상적 실천을 이 글의 출발점으로 삼고 “개인은 공간 위를 이동함으로써 시간을 소비하는 기획에 참여하는 목적을 가진 주체”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복잡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시공간 위에서 살아가고 그 경로와 정거장(domain)을 추적하면 개인의 연대기가 나온다는 말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의 삶은 걸음걸이의 궤적이고 도시는 이 수많은 걸음걸이들이 얽히고 설키는 집합이다. 지금 다시 이 말을 생각해보면 학교와 직장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쇼핑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상생활이 도시를 구성하는 것이고 이를 돕기 위해 정보가 제공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가 제공하는 정보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딪치고 막히고 길을 잃는 것과 같은 ‘갈등’ 없이 지낼 수 있게 된다.

흔히 ‘약속’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어릴 때부터 도시의 일상에 필요한 정보를 익히게 된다. 찻길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교통 신호 체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지하철과 버스 노선 체계, 이외에도 주소, 전화번호 체계, 차든 사람이든 앞으로 가고 좌우로 돌아가게 유도하는 사인, 점자 블록 등 도시 인프라와 관련된 것부터 쓰레기 분리수거 지정일과 차량 5부제, 손 씻기와 같은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 체계와 정보는 누가 만들어서 어떻게 제공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만 하는가, 우리가 도시의 정보에 개입할 수는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디자인 교육을 받아온 나로서는 정보전달이 제대로 되는지를 따져왔지만 요즘에는 도시에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정보를 전달받고 따라야 하는 것 자체가 큰 짐이 된다.

그 많은 정보가 헬베티카 서체와 네덜란드식 공공 정보 그래픽으로 처리되었다고 해서 해소될까? 아마도 그것은 한정된 공간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선남선녀의 이른바 ‘감정노동’(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늘 ‘스마일’로 배꼽인사를 하는 서비스 직종의 노동) 서비스를 받는 것 같은 아찔한 상황이 아닐까? 그들이 한꺼번에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건네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문제는 정보의 디자인 수준이 아니라 정보의 양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의미 전달의 오류를 막고자 절제된 픽토그램이나 기호로 정보를 전달하던 고전적인 디자인의 미덕은 LED 디스플레이가 도시 인프라 곳곳, 심지어는 건물 외벽을 뒤덮는 통에 이제 거의 사라진 것만 같다.

데이비드 하비가 인용한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주장을 보면 그래도 원초적인 영상이 도시를 휩쓰는 현실을 극복할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드 세르토는 일관된 총체적 공간 체계가 ‘보행자 중심 수사학(pedestrian rhetoric)’으로 대체된다고 보았고, 대중적이고 어수선한 거리문화를 “이미 ‘규율’의 올가미에 걸려든 집단 혹은 개인들의 분산적이고 전술적이며 임기응변적인 창조성이 보여주는 은밀한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응용해보면, 일방적인 도시의 정보 제공에 주눅 들지 않는 대중의 대응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수많은 걸음걸이는 무수히 많은 행동이고 그것이 도시의 특정한 공간을 창조한다고 하니 정보를 수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도시의 정보(그것이 수사학적이든 원초적이든)는 창의적인 보행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여전히 지정된 보행을 강요한다. 지난해부터 홍보하고 있는 우측보행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게 걷도록 보행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좌측과 우측의 어느 쪽이 더 편한지를 설정하는 것, 그래서 오랫동안 익숙해온 것을 바꾸느라 과학적인 증명까지 하는 과정은 당혹스럽다. 계몽, 계도라는 개념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느라 귀에 들리는 정보의 양이 한층 늘어났다. 지하철에서는 다음 역을 알리는 정보면 충분했는데 여기에 계몽을 위해 우측보행에 대한 안내가 더해지기도 했다. 게다가 마치 무료 통화를 위해 견뎌야 하는 광고처럼 다음 정거장 주변의 스폰서(피부과, 학원 등) 소개까지 들어야 한다.

이러한 도시의 정보에 대한 개인의 대응은 제각각이다. 스마트폰으로 소음에 무심하게 반응하면서도 도시의 정보와 꾸준히 연동시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래피티 형식의 도시 정보 교란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디자인그룹 FF의 ‘I Like Seoul’ 프로젝트는 도시의 안정화된 정보 체계에서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버그(software bug) 또는 바이러스인 셈이다.

이들은 일방적인 정보 제공과 규칙 준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는데 정보제공자와는 다른 목소리를 기존의 정보 전달 매체에 얹는 방식으로 개입했다. 드 세르토가 이야기한 창의적 보행은 이런 부분까지 포용하지 않았겠는가.


도시의 정보는 어느덧 개인과 기업, 정부가 정보통신체계로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 예컨대 길찾기(way finding)나 주변검색과 같은 정보는 사인시스템뿐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공공키오스크에서도 제공된다. 그러나 정보란 계몽이나 질서 유지, 홍보를 위한 텍스트와 이미지의 즉물적인 수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공간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발걸음 사이에서 공감각적으로도 존재한다. 걸으면서 순차적으로 변하는 공간의 깊이, 길모퉁이를 돌거나 고갯길을 넘으면서 조금씩 펼쳐지는 풍경 등은 로드뷰, 구글어스 따위로는 담을 수 없는 향기와 소리, 바닥의 질감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Posted by 지콜론북 G콜론